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지 쿠쿠츠카 (문단 편집) == 상세 == 1948년 [[폴란드]]의 공업도시 카토비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죽을 때까지 실롱스크 광산의 전기 기술자로 일했다. 막대한 후원을 등에 업고 등반을 했던 서구의 산악인들과 달리 그는 상대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지 못한 공산국가 폴란드의 산악인이었고, 또한 동구권의 산악인이었기 때문에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등반을 해야했다. 안전한 외제 카라비너를 얻을 수 없어 소방대에서 사용하는 무쇠 카라비너를 사용했고, 아이젠은 동네 주물 공장에서 제작했다가 등반을 하기도 전에 모두 버려야하기도 했다. 피켈을 잃어버렸다가 공산당의 조사위원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범행을 자백해야 했던 적도 있다.[* 폴란드 입장에서 피켈은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라 산악회의 소유였고, 산악회의 정식 재산 목록에도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 과거 가난했던 한국 산악인들도 사고가 나서 실신한 뒤 깨어서 가장 처음 한 말이 "내 피켈 무사해?" 였다고 하니 어느 나라나 똑같은 모양이다.] 그는 돌로미테를 좋아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진짜 장비를 볼 수 있는 꿈의 나라"[* 돌로미테는 알프스 동부에 있다.]였고 서구의 부유한 클라이머들이 버리고 간 카라비너와 하켄을 회수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외 고산 원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카트만두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유는 역시... 그의 말을 빌리면 "서방 원정대가 버리고 간 중고 장비들을 반 값에 사들일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마칼루 등정 때는 단독으로 북서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신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했는데 등정시비가 붙었다. 정부 연락 장교가 그가 마칼루를 등정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 이 등정 시비는 정확히 8개월 후 1982년 한국 등반대[* [[허영호(산악인)|허영호]] 대장이 직접 가지고 내려와서 의혹을 해소했다.]에서 그가 마칼루 정상에 놓고 온 무당벌레 장난감을 가지고 내려오면서 해결됐다. 이후 정부 연락 장교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빚어진 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듯 미칠듯이 열악한 상황에서 79년 로체를 무산소로 등반하는 것을 시작하여 그야말로 '''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80년대는 폴란드 등반대의 최전성기로 폴란드 산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자바다 대장 이래 예지 쿠쿠츠카, 크쉬스토프 비엘리츠키, 보이텍 쿠르티카, 안제이 초크,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츠 등은 이 시기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다. 에베레스트 남벽 신루트를 개척 등정하였고, 마칼루는 '''단독'''으로 북서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신루트를 개척하는 등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세우게 된다. K2 남벽은 86년도에 초등된 이후 36년이 지난 2021년 현재까지도 재등되지 않고 있다. 1988년 10월 13일, 결국 그는 7년 11개월 14일만에 14좌 등정을 완료한다. 그리고 89년 로체의 남벽을 등반하던 도중 8,350m 지점에서 자일이 끊어지면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지금까지 8,000m급 산에 '''그와 같은 횟수의 동계 초등을 달성한 인물은 시모네 모로[* 시샤팡마, 마나슬루, 가셔브룸 2봉, 낭가파르밧 동계 초등.] 뿐이다.'''[* 근래까지 남아있는 동계 미등봉은 낭가파르밧과 K2였는데 2016년 2월 26일 시모네 모로를 포함한 3인의 다국적 원정대가 낭가파르밧의 동계초등을 성공시켰다. 그 어렵다던 K2도 2021년 1월 네팔 셰르파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동계 초등에 성공하였다.] 또한 2021년 현재까지 '''8,000m급 산에 가장 많은 루트를 개척한 인물'''이다. 현재는 많은 산악인들이 8,000m급 산의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도전을 했고 또 많은 루트가 개척되었기에 이 기록 역시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